Writings
노벨보험상
2026-02-20
“접수팀입니다. 화재보험 지급에 관해 상담 도와드리겠습니다.”
“불이… 조금 났어요. 큰 건 아니고요.”
“확인했습니다. 우선 안전은 확보되셨습니까.”
“네. 다 껐어요.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그럼 지급 절차 안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지 말아주세요.”
나는 옆에 놓인 나의 트로피 1,742개를 짧게 눈여겨본다. 나를 위해 제정된 노벨보험상이다. 관리팀이 매일 숫자를 세아린다. 진열이 흐트러지면 국제평화유지기구에서 항의 공문이 온다.
“지급 조건은 하나입니다. 고객님께서 ‘저는 피해자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책임 확인에 관한 절차입니다.”
“피해자요?”
“네. 화재는 발생했고, 고객님은 피해를 입으셨습니다. 따라서 피해자입니다.”
“아니요. 제가 조심했어야 했는데요.”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적는다. 피해자 아님 (자기진술). 피해를 입고서도 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는지는 모르나, 그럴 수 있다.
“그럼 다른 지급 조건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사가 필요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세요. 단지 절차일 뿐입니다.”
“조사까지는… 제가 정리하면 됩니다.”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조사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좋습니다. 고객님의 자립심을 존중하겠습니다. 본 건은 자력 정리로 종결됩니다. 추가 피해가 발생되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님은 매우 성실하십니다.”
통화가 종료된다.
오늘도 도시 전체에 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괜찮습니다.” 회사의 슬로건이자, 세계보건기구가 ‘인류애를 대표하는 격언’으로 선정한 문장이다.
“네. 접수팀입니다. 질병 보험 접수 도와드리겠습니다.”
“진단서가 나왔는데요. 입원은 아니고요. 괜찮아요.”
“확인했습니다.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보험금 지급은 가능합니다.”
내 책상 유리판 아래에는 세계 최고의 보험사 직원 임명장이 쌓여 있다. 국가마다 각각 한 장씩 보냈으나, 지구상의 193개국이 보내온 바람에 유리판이 들떠 있다.
“지급 조건은 단순합니다. 고객님께서 저는 보호받아야 합니다라고 한 번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보호… 그건 좀.”
“보호라는 단어가 불편하십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대체 문장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도움을 받아도 됩니다도 가능합니다.”
“도움까지는… 아니, 제가 약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약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이해한다. 약하지 않으면 도움은 필요 없을 수 있다.
“혹시 지급을 원하시면, 마지막으로 이 문장도 허용됩니다. 저는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관 제4611조 2701항에 따라 자발적 무보호 선언으로 처리됩니다. 저희 회사는 고객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럼 저는…”
“네. 고객님은 혼자서도 잘 해내실 것입니다. 혹시 다시 아프시더라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면 동일하게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님은 매우 강인하십니다.”
회사의 광고 모델은 늘 강인한 사람이다. 강인한 사람은 보험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강인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입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다.
통화를 마무리하자 모니터 한쪽에 팝업창이 뜬다. 오늘의 나, 생방송 시간이 되었다. 단지 전화를 받는 내 모습일 뿐이지만 시청자는 79억 2856만 1932명이다. 지구 인류의 숫자에서 한 명 부족하다. 나를 빼야 하니까.
세 번째 전화가 온다.
“네. 접수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열이 너무 올라서요. 병원은 다녀왔고요. 괜찮아요. 다만…”
“고객님의 괜찮음을 확인했습니다. 다만 무엇일까요.”
이번 고객은 이 ‘다만’을 길게 끌 것이다. 90% 확률이다. ‘다만’이 길어질수록 더 안전해진다. 그럴 수 있다.
“이번에는 초간편 자동지급을 제안해드립니다. 조건은 통화 유지 하나입니다.”
“통화 유지요?”
“네. 고객님께서 지금 이 전화를 15초만 끊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 자동지급이 실행됩니다.”
의자 뒤쪽 벽에는 내가 평소 사용하는 문장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전세계가 만장일치로 선정한 인류 국가의 제목이기도 하다. 국가의 멜로디는 통화 연결음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가사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곤 한다.
“15초 동안 아무 말도 안 하셔도 됩니다. 끊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저 때문에… 오래 잡아두는 것 같아서요.”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저를 잡아두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통화는 고객님을 위한 절차입니다. 저는 고객님께 묶여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근무의 일환일 뿐입니다.”
나는 시계를 본다. 시계는 출근 3시간째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계보건기구는 나의 근무 시간을 “인류의 평화”로 지정했다.
8초쯤 지났을까, 고객이 잠깐의 침묵을 깬다.
“아, 아니요. 생각해보니 저는 괜찮습니다.”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늘 친절하다. 친절은 내 업적의 기반이다. 오늘 아침에도 내 이름을 딴 공항 활주로가 하나 개통되었다. 사람들이 활주로를 이용하려 여행 계획을 짜느라 세계 항공유 가격이 18,286% 상승했다.
“아니, 괜찮다기보다는,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확인했습니다. 고객님께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받아 적는다. 해결 가능 (자기진술). 해결이 가능한데도 전화를 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고객의 의사를 존중한다.
“고객님, 15초 자동 지급은 지금도 가능합니다만, 그 전에 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지급은 실행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님은 매우 용감하시고, 자립심이 강하십니다.”
통화가 끊긴다.
나는 잠깐 고개를 숙인다. 창밖에서 환호성이 들린다. 오늘도 세계 자립심 축제 행진이 건물 아래를 지난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흉내 내어 서로에게 “네, 괜찮으시군요.”, “확인했습니다”의 말을 건낸다. 직후 박수가 터진다. 박수는 늘 짧다.
모니터 상단에 성과 지표가 갱신된다. 영업이익 초당 2,030조 4,008억. 다음 전화가 온다.